두타~청옥산 20150815 1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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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두타놈 조경렬 무진기행](길위의민문학) 오래 전 부터 계획을 세우다가 7월이 되어서야 찾은 두타·청옥산은 필자에게 아련한 추억과 20대 젊음의 고뇌가 녹아 있는 산이다. 주말에 서울을 출발한 산행 팀이 도착한 곳은 삼척시 미로면 사둔리 천은사였다. 천은사에서 산행을 시작해 쉰움산을 지나 두타산과 청옥산에 이르는 종주코스로 잡았기 때문이다.명산대천을 찾는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산길 오십 리, 20km에 달하는 종주 코스는 새벽부터 산행을 시작해야 한다. 이른 새벽 산행 기점에 도착하여 출발 준비를 한다. 새벽부터 오르는 쉰움산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두타산頭陀山(1353m)의 영지로 산정에 천제봉, 고초봉이 있다. 이곳 산정에는 수많은 사람이 앉을 만큼 넓고 평평한 반석이 있고, 기암괴석이 솟아 오른 그 위에 원형의 크고 작은 우물 50여 개가 있었다 하여 오십정산 이라고도 불린다.동해의 무릉도원 무릉계와 쌍폭의 경승 천은사는 입구에서부터 수백 년생의 고목들이 즐비하게 우거져 산사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작은 개천의 물소리가 시원하게 두타놈 산행객의 귀를 적신다. 쉰움산 정상에 이르는 길은 매우 가파르게 치달아 가픈 숨을 쉬며 올라야 한다. 날씨가 꿈틀거리며 동해바다의 염분 섞인 해풍을 쉴 새 없이 밀어 올렸다. 그 덕에 덥지는 않지만 끈적끈적한 염분의 촉감이 온 몸을 감싸고 돌았다.새벽에 산행을 시작한지라 1시간 반을 오르니 일출의 장엄한 모습이 동해바다로 부터 열리고 있다. 해는 구름에 가려 붉은 노을만 가득하다. 내려다보이는 계곡의 푸른 숲은 마치 그린의 잔디처럼 아름답다. 이제 쉰움산을 지나 두타산을 향해 능선 길로 올라야 한다. 필자와 두타산의 인연은 오래전 일이다. 세월은 참 무상하다. 20대 후반 필자가 강원도 산골 암자를 찾아 들었던 일은 잊지 못할 기억의 편린片鱗으로 남아 있다. 대학 때 부터 세운 목표가 졸업하고도 끝이 나지 않은 상황에 새로운 발판의 계기로 삼고자 찾은 곳이 바로 저기 내려다보이는 두타산 관음암이다.당시 국가고시를 준비 한지 3년이 지나도 성과가 없어 의기소침한 두타놈 필자에게 한 동도제형同道學兄이 이 산사를 추천했다. 그래서 찾아든 곳이 두타산 무릉계의 관음암이다. 그 때 처음 도착한 그 곳 동해시는 색다른 풍경으로 다가 왔다. 동해시에 도착하니 무릉계행 버스가 멀리서 걸어오는 승객을 기다려 주는 시간관념에 놀랐다. 작은 도시만이 가질 수 있는 공간적 시간적 여유로움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무언가에 쫓기듯 한시가 바쁜 서울에서는 타려고 뛰어가도 휑하니 달아나 버리는 것이 버스 아닌가.그러나 이곳은 달랐다. 한 사람이라도 태우기 위해 기다려 주는 여유가 있었다. 조급한 마음에 그만 몸을 푸르르 떨었다. 삼화사 입구에 도착하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관음암까지는 산길로 2km를 더 가야 했다. 배낭 가득 무거운 책 보따리를 메고 산길을 힘들게 걸었던 기억이 아득하다. 삼화사에서 거의 뛰다시피 올라가니 온 몸에 힘이 빠지고 정신이 혼미했다. 힘겹게 암자에 들어서니 적막고요였다. 어두워지는 산사에 인기척을 하니 법당에서 할머니 한 분이 나오시면서 하시는 말씀.“어찌 왔드래요?” 할머니가 두타놈 강원도 사투리로 불청객의 몰골을 살피며 묻는다.“네, 저기……. 스님은 안계신가요? 서울에서 공부하러 왔는데요.”“시님이 아무 말 안 했는데이……. 누굴 찾아요?”난감했다. 사전에 연락을 했는데 스님은 예고 없이 하산하고 없었다. 연락할 방법이 없다. 스님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객방 하나를 달라고 하여 일단 쉬기로 했다. 깊은 산속이라 할머니께서 야박하게 하시지는 않았다. 심산유곡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게 그토록 감사하게 느낀 적은 없었다.그렇게 해서 시작 된 필자의 산사 생활은 그해 겨울을 보내고 봄이 오고서야 끝났다. 그때 한겨울의 산사는 적막강산이었다. 누가 찾아오지도 않고 오직 스님과 필자 그리고 공양주 할머니 셋뿐이었다. 계곡의 폭포수 아래 넣어 둔 집수관이 낙엽에 막히면 얼음을 깨고 들어가 손보는 일도 해야 했다. 그러나 이때 심리적 안정감을 되찾았다. 이날 산행은 그 인연의 끈을 다시 풀어보리라 생각하고 두타·청옥산을 돌아 피마름골에서 하늘문을 넘어 관음암에 이르는 산행 길에 나선 것.쉰움산에서 능선 두타놈 길로 두 시간을 오르니 두타산 정상이 나타났다. 산 이름 두타頭陀는 ‘속세의 번뇌를 버리고 불도 수행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두타산에는 두타산성, 사원터, 무릉반석, 학소대와 쌍폭 등 명소가 많다. 계곡에 수백 명이 함께 놀 수 있는 반석이 많아 무릉도원武陵桃源 병류천지別有天地를 연상케 하는 그 이름도 무릉계이다.두타산 정상에 이르니 날씨가 변덕을 부려 운무雲霧가 산정을 에워싸며 세찬 바람이 몰아친다. 마치 광풍이라도 부는 것처럼. 정상에는 꽤 넓은 공간이 있지만 몰아치는 바람 때문에 오래 쉬지 못했다. 정상에서 박달령 까지는 숲속을 내려가는 내리막길이다. 그 이름도 정겨운 박달령. 우리 강산에는 곳곳에 계곡이나 산정에 위트 있는 이름들이 많다. 여기 두타·청옥산만 하더라도 박달령, 연칠성령, 바른골, 문간재 등 명칭이 지극히 자연을 닮았다.쌍폭으로 바로 내려갈 수 있는 박달령에서 잠시 쉬며 숨을 고른다. 청옥산으로 오르는 길목의 군데군데에 어느 화상이 야생화를 채집 해 간 것처럼 땅이 파헤쳐져 있다. 누가 두타놈 이런 불법을 자행했단 말인가. 경험 많은 산행대장의 말씀, 멧돼지란 놈의 소행이란다. 등산로 주변의 자생식물 뿌리를 캐먹느라 땅을 파헤친 모양이다.△무릉계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쌍폭의 위용. ‘무릉武陵’이란 명칭은 세상과 멀리 떨어진 별천지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무릉도원武陵桃源’에서 기인한다. 이는 중국의 시인 도연명이 지은 ‘도화원기’에서 비롯되는데, 도화원기는 중국 진나라 때 ‘무릉’이란 지역에 사는 한 어부가 복사꽃 핀 숲속의 물길을 따라갔다가 난리를 피해 숨어든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상낙원의 별천지를 방문해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왔다는 이야기이다. 복사꽃이 화사하게 핀 이상향의 세계는 돌아온 어부가 다시 그곳을 찾으려 했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로 끝난다.능선을 타고 청옥산에 오르니 다시 거센 바람과 운무가 산정을 감싼다. 이 곳 청옥산 정상, 오늘 산행의 반환점에 서 있다. 청옥산은 두타산에 비하여 정상의 공간이 좁다. 아주 소박하고 정감 있는 산정이다. 이제 연칠성령으로 하산을 해야 한다. 군데군데 여름 꽃인 하늘나리, 하늘말나리가 두타놈 이제 막 피기 시작했다. 1400m 고지라 꽃망울은 작지만 앙증맞고 귀엽다. 하산 길은 오르는 등산登山보다야 수월하다. 수십 길 낭떠러지 칠성폭포를 지나 바른골의 넓은 반석들을 감상하며 앉아도 보고 거닐어 보기도 하며, 심산유곡의 경이로운 풍취에 취해본다.드넓은 반석 위로 시원한 계류가 흐르고, 짙은 녹음방초綠陰芳草가 여름 하늘을 뒤덮었다. 여기에서 부터 두타산과 청옥산의 명소들이 즐비하게 모여 있다. 문간재 위에 있는 신선봉의 남근석, 그 건너편 장군바위, 쌍폭, 용추폭포와 선녀탕 그리고 하늘문에서 관음암까지. 신선봉의 남근석은 보는 방향에 따라 남근의 리얼리티한 모습과 낙타가 하늘을 보고 서 있는 듯한 형상 등 다양한 모습을 연출한다. 그 건너편에는 수십 길의 적벽으로 된 장군바위의 패기 넘치는 위용이 웅장하다. 그리고 박달령 계류와 용추폭포가 합류 되면서 쌍폭을 이룬 모습은 폭포로 병풍을 두르듯 아름다운 풍취의 절정을 이룬다.△무릉계武陵溪는 조선 선조 때 삼척부사 김효원이 무릉계곡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신선이 사는 곳처럼 아름답다고 두타놈 하여 '무릉도원'으로 불린다. 이 무릉계의 절경을 이루는 무릉동 일대에는 태암胎巖·미륵암·반학대半鶴臺·능암能巖·쌍현암雙峴巖·학소대鶴巢臺 등의 기암괴석이 경승을 이루며 계곡 끝에 용추폭포가 웅장하다.이제 하산 길 마지막 코스인 피마름골에서 하늘문에 이르는 사다리는 산행에서 힘을 뺀 허벅다리를 또 한 번 놀라게 한다. 거의 80도 각도의 적벽 급경사 사다리를 약 50미터는 올라야 하는데 매우 힘든 길이다. 굳이 관음암으로 가지 않는다면 계곡을 따라 하산하면 된다. 하늘문을 넘어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암자가 숲속으로 빠끔히 얼굴을 내민다.필자가 한 겨울을 보냈던 암자다. 그때는 이 길이 없었다. 예전의 모습은 간데없고 객사의 신축과 채마밭은 절집 마당으로 바뀌었다. 필자가 기거했던 방은 간데없고 새 요사채가 들어서 있다. 간데없는 옛 모습이 그리웠다. 20여 년 만에 암자를 찾아 변화의 아쉬움에 빠진 필자에게 점심과 시원한 약초 차를 내어 놓는 보살님의 따뜻한 마음이 위안을 준다. 때 늦은 점심공양을 내놓은 절집 인심으로 위안 삼고 몇 번을 두타놈 뒤돌아보며 산문을 나섰다.(무진기행의 길위의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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